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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그

항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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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화 아래로 뾰족한 소음이 널린다. 녹이 슨 창틀이 떨어져 나갈 바람 속에서도 온전한 기색의 페리 윌리스는 눈과 뒤섞인 스테인리스 글라스의 조각 사이로 적적한 길을 내면서, 근방의 피아노로 다가간다. 살이 벗겨진 은촛대와 찢겨 너덜너덜한 책자 따위가 피아노의 뚜껑 위에 놓여있다.
촛대의 받침대로부터 가늠할 수 없을 만큼 오래 전에 녹은 초의 형태가 단단하게 굳어있었다. 페리 윌리스는 까맣게 마른 심지 근처에 숨을 내쉬어 창백한 연기를 흉내낸다. 이내 그 자리에 해군모를 내어주었다.
그 뒤에 가지런히 늘어뜨려놓은 외투 위에도 금세 순백한 찬바람이 쌓였다. 부서진 목제의 틈으로 녹지 않은 눈이 이겨져 내려온다. 그치지 않고 흩날리는 머리를 틈 없이 끌어와 묶었다.
검집의 차가운 한숨처럼 레이피어가 빠져나왔다. 바람 소리에 가늘게 우는 검을 달래는 것처럼, 느슨할 틈 없이 손잡이를 휘감고, 손목을 정중하게 돌린다. 검이 몇 차례 허공을 휘감자, 깨지고 낡은 바닥에 오른발이 묵직하게 실린다. 절제된 움직임으로 낮은 자세를 취한 직후, 바닥을 향하던 검의 끝이 허공을 깊숙하게 찌르고 들었다.
이후로 쉼 없이 연결되는 검로는 마지막 의식의 그것을 닮아있었다.

녹이 슬고 깨진 유리창 밖으로 수많은 빛이 날아오르고 있었다. 유독 벅찬 손으로 품에 외투를 끌어안는다, 발갛게 달아오른 숨을 가다듬었다.

"내 소원을 잘 모르겠지만."

정적인 이 해군에게 알량한 소원을 날릴 재주는 없다. 늘 타인의 소원 등불을 빌려가기 마련이다.

"그래요, 제게도 소원이라는 게 생기면 좋겠군요."

하늘에 대고 퍽 여린 숨을 쉬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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